석남사는 불자들에게는 국내외 가장 큰 규모의 비구니 종립특별선원(宗立特別禪院)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울산사람들에게는 늘 열려있는 휴식처로서 늘 푸르른 산림과 여름에는 시원한 계곡을 제공하며 한겨울에는 가지산의 설경과 어울려 가람을 하얗게 덮은 눈은 우리들에게 절경을 보여줍니다.
석남사(石南寺)는 가지산(迦智山)동쪽 기슭, 울산 울주군 상북면 덕현리에 위치한 절로서 대한불교 조계종 제15교구 본사인 통도사의 말사입니다. 고헌산맥은 저 멀리 강원도 태백산맥이 남쪽으로 뻗으면서 줄달음질을 치다가 도중에 경상북도 청도의 운문산을 형성한 뒤 다시 뻗으면서 형성되는데, 가지산, 신불산, 간월산, 천황산, 영취산 등의 영산 명봉들을 이루어 놓고 있습니다. |
가지산에는 석남사, 신불산에는 간월사, 영취산에는 통도사 등의 신라 명찰이 들어 앉게 되었으니 불심과 영통한 법운 영역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석남사(石南寺)란 이름은 가지산(迦智山)을 석면산(石眼山)이라고 하는데 이 산의 남쪽에 있다해서 지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습니다. |
![]()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 · 극락전 · 강선당(講禪堂) · 조사전(祖師殿) · 심검당(尋劍堂) 등 30여 동이 있으며, 가장 오래된 건물로 1791년(정조 15년)에 세운 극락전이 있으며 다음 가는 건축물로는 순조 3년에 세운 대웅전입니다. 이 외에도 문화재로 도의국사 사리탑으로 전해지는 보물 제369호 석남사 부도와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2호인 삼층석탑, 조선 초기의 엄나무구유 · 돌구유 등이 있습니다. |
![]() 헌덕왕(신라제41대憲德王 서기809-826)에 한국에 최초로 선을 도입한 도의국사 (道義國師)가 일찌기 영산 명지를 찾다가 이 곳 가지산의 법운지를 발견하고 터를 정한 뒤, 신라의 호국을 염원기도하기 위해 창건하셨습니다. 도의국사는 신라 제 37대 선덕왕 1년에 당나라에 건너가서 지장의 제자가 되어 그 불법을 물려 받고 법호를 도의라고 개명한 뒤 821년에 신라로 금의환향하여 최초로 선문을 개설하여 우리나라의 남종선의 시조가 되었으나 고국에서는 아직 그의 혁신 이념을 이해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설악산 진전사(陳田寺)에 들어가 제자를 기르며 때를 기다리다가 3년만에 석남사를 창건하고 가지산파의 개조가 되었습니다. |
중건중수
창건이후 여러 차례 중건중수(重建重修)를 거듭하다가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으나 그 후 1674년 (현종 15년) 언양현감 강옹(姜甕)의 시주로 탁영(卓靈), 자운(慈雲), 의철(義哲), 태주 (泰珠)가 중창하였고, 진혜(振慧). 쌍원(雙遠). 익의(益儀). 성진(性眞)이 단청하였으며, 동시에 종과 북 등의 불구(佛具)를 마련하였습니다. 이어 정우(淨佑). 각일(覺日). 석맹(碩孟) 등이 극락전.청풍당. 청운당. 청화당. 향각(香閣)을 증축 하였고, 희철(熙哲)선사가 명부전을 세웠습니다. 1803년(순조 3년)에 침허(枕虛), 수일(守一)선사 등에 의하여 중수되었습니다. 그 후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황폐해졌다가 1912년 우운(友雲)스님에 의하여 다시 중수된 바 있으나 한국전란으로 폐허가 되어 그나마 남아있던 신라고찰의 모습이 모조리 파괴되어 버렸습니다.
이렇게 폐허가 된 것을 1957년 비구니(比丘尼) 인홍 (仁弘)스님이 주지로 부임하면서 먼저 대웅전, 극락전, 그 밖의 부속시설을 중수중창을 하고 다음에 종각, 침계루, 심검당 등을 신축하여 사찰의 면모를 일신케 하였다. 크게 각 당우를 일신하여 현재에 이르렀으며, 이때부터 비구니들의 수도처로서 많은 비구니들의 정진하는곳으로 사용되어지고 있습니다.
이곳의 삼층석탑은 824년에 도의가 호국의 염원아래 15층으로 세운 것이라 하나, 임진왜란 때 파괴되어 방치되어오다가 1973년 스리랑카의 승려가 사리 1과를 봉안하면서 3층으로 개축한 것입니다.
가지산 석남사 일주문.
1984년에 신축하였으며 산사에 들어서면 맨 먼저 만나게 되는 문으로써 절 이름 현판이 걸려 있다.
현판(懸板)
이 문의 뜻은 하나(一)이라는 데에 있다. 불교에서는 우주 만유를 일심(一心)의 표현으로 보는 것이며 법계(法界)전체를
일심의 그림자로 보는 것이기 때문에 화엄경에도 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 하였으며 회삼귀일(會三歸一)이라 하여고 만법귀일(萬法歸一)이라 하는 것이다. 모든 것은 일심에서 일어난 현상이라 결론짓는 것이 불교의 본질인 것이다.
기둥이 한 줄로 서 있다는 데에서 일주문이란 이름이 유래했으며 기둥이 일렬로 서있는 위에 정교한 건축이 이루어졌는데
이것은 역학적으로 중심의 힘을 이용하여 절대의 건축미를 살린 특유의 양식이다.
일주문이란 처음에 기둥을 하나 세워 절임을 알리던 것이 변하여 지금의 일주문 형태가 되었으며 기둥을 하나만 세운 것은
不二를 나타내며 그래서 不二門이라고도 한다.
이 문을 경계로 하여 문밖을 속계(俗界)라 한다면 문안은 진계(眞界)인 것이며, 이 문을 들어설 때 일심에 귀의 한다는 결심을 가지도록 하는 마음을 촉진시키는데 그 뜻이 있는 것이다.
일주문을 기준으로 해서 승과 속의 경계가 이루어지며 세간과 출세간, 생사윤회의 중생계와 열반적정의 불국토로 나누어진다.
일주문 배면
일주문 초입...
곱게 뻗은길과 나무들이 인상적입니다.
쌓은이들의 정성이 돋보이는 돌탑입네요...
청운교
침계루 밑에서 보이는 삼층 석가 사리탑
침계루
대웅전과 마주보는 누각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각집이다. 1974년 인홍스님이 중건하였다.
강선당.
이 당은 다포계 형태의 팔작지붕이며 정면8칸, 측면 4칸이고 학인스님들이 공부하는 장소로 이용되고 설법과 선이 이루어지는 큰 방이다.
삼층석가사리탑
대웅전 맞은편에 자리하고 있는 삼층 석탑은 창건주이신 도의국사가 신라 헌덕왕 16년에 호국의 염원을 빌기위하여 세운 15층 대탑이었던
것을 임진왜란시 파괴되어 탑신의 기단만 남아있었다.1973년 인홍스님의 원력으로 삼층탑으로 다시 세우고 탑속에 부처님의 사리를 모셨다.
스리랑카 사타시싸스님이 부처님 사리삼과(三課)를 모셔와 이과(二課)는 가야산 묘길상보에 봉안하고 일과(一課)를 이 탑에 봉안하였다.
탑높이는 11m 폭은 4.75m이다.
석남사 돌수조.
종각
침계루의 서쪽에 위치하며 2층 건물로 예불이나 법회 등의 의식을 할 때 소리를 내는 사물(四物:범종,법고,목어,운판)을 비치하고 있다.
선열당.
요사(療舍)채의 하나로 인홍선사가 열반하실 때까지 생활하시던 공간이다.
삼층석탑.
대웅전 뜰앞에 위치하고 있던 것을 1973년 4월에 극락전 앞으로 옮겼다. 높이 5m 폭 2.3m인 이 탑은 신라말기에서 고려초기 시대의 탑으로 추정된다.
극락전
극락전은 아미타불(阿彌陀佛)을 모신 법당으로 아미타불은 무량수(無量壽), 무량광(無量光)이라고 번역된다. 극락이란
불교의 이상세계인 불국토를 뜻하는 말로서 극락세계에 왕생한 중생들이 아무런 고통없이 지극한 기쁨으로 수행하는
불국토를 이르는 말이다. 석남사 극락전 중앙에는 아미타불을 모셨고, 좌우에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을 모셨다. 법당 좌편에는 독성단, 우편에는 산신단이 있다.
조사전
조사전에는 역대 조사나 영정을 모신 곳으로 중앙에는 도의국사 진영이 모셔져 있고 좌우편에는
월하당, 퇴운당, 경월당, 남호당, 원허당선사 등의 진영이 모셔져 있으며, 인홍선사 진영도 함께 모셔져 있다.
특히 통도사의 영각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영정을 보존하고 있으며, 송광사 국사전과 해인사 조사전, 신륵사 조사당 등이 대표적이다.
대웅전
사찰의 으뜸가는 큰 법당을 대웅전이라 한다. 대웅이란 부처님의 덕호(德號)로 부처님의 위신력이 온갖 마군을 항복 받는다는 뜻이다. 보통 불교의 교조인 석가모니 부처님을
본존불(本尊佛)로 모신다. 석남사의 대웅전은 1974년 인홍스님께서 해체복원한 건평 37평의 건물로 중앙에 석가모니불상과 좌우에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봉안되어있다.
도의국사 부도탑에서 바라본 석남사 전경...
도의국사 부도.
창건 당시에 건립된 것으로 높이가 3.53m 이다.
팔각원 당형으로 되어있고 간석에는 안상속에 화문대를 돌렸고 팔변연화대위에 놓인
탑신석 전후에는 문비명이 새겨져 있다. 전면 좌우에는 문비명과 신당 입상이 새겨져 있다.
부도란 스님네의 사리나 유골을 넣은 석종 모양의 돌탑을 말한다.
엄나무구유..
청화당
원래 청화당은 요사로 서기 1912년에 우운사가 창건한 43평의 건물로 사중 중진스님들이 거처하는 판도방이 들어 있었으나 협소 불편하여 그 규모를 77평으로 확대해 짓게 되었다.
백인당
백인당은 석남사 요사 중 일당우의 명칭으로 이름 그대로 인욕 하심의 교훈을 보여주는 집이다. 사세 확장으로 백인당을 34평으로 개수하게 되었다.
영운주지가 사중 중진과 의논 대중외호의 정신으로 청화당과 함께 시작한 불사이다. 이 공덕이 불은에 보답하고 삼보를 수호하여 불법이 후세 만대에 유통되는 인연이 될 것이다.
일주문 지나 약 150m 정도 걸으면 도로의 남쪽에 위치한 부도 밭에 특이 양식의 부도가 있다. 조선 중기 이후 석남사에 주석하신 명등들을 모신
것으로 연대는 1741~1802년 사이에 4기의 부도가 건립되었다.
참조 문헌 : 석남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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