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이야기(수도권)

아들과 함께 찾은 동구릉...

자연에 동화된 로드킹 2009. 2. 1. 18:32

설 연휴 아침에 눈이 제법 내려 산으로 가까 하다가 집사람 만두하러 형내 간다고 둘째넘을 떠 넘깁니다.

산에 가자고 살살 달래 봐도 싫타고 하니....

눈이 내리면 함 가봐야지 생각하고 있던 동구릉이 생각나 길을 나섭니다...

구리 동구릉에 도착하니 입장료가 천원이고 초등학생은 무료입니다.

 

사적 제193호 동구릉.

동구릉은 태조의 건원릉 부터  경릉(24대 헌종, 비 효현왕후 김씨, 계비 효정왕후 홍씨)까지 9릉 17위의 왕과 왕후릉이안장되어 있고 동구릉이라 명명된 것은 철종 6년(1855) 8월 26일에 수릉(추존 문조, 순조의 장남)을 9번째로 모신 이후 부터 입니다.

 

 

 먼저 앞서 들어 가는 아들넘.

 

 들어온 입구.

 

 홍살문.

홍살문은 왕릉의 들머리임을 알려주는 건축학적 장치로 이곳을 지날때 몸과 마음가짐을 엄숙히 하고 여기에 모셔진 분들에게 경건한 예를 갖추라는 뜻으로 세워진 것으로서 혹은 홍전문 이라고도 합니다.

 

 세월의 흐름에 기울어진 소나무들....

 

 관리 사무소.

 

 관리소앞 느티나무 휴식처.

 

 아픈 나무들이 많아 치료중입니다.

 

 

 수릉(綏陵)은 하나의 봉분에 혼유석 역시 하나만 마련되어 있어 마치 한 사람만을 위한 단릉처럼 보이지만, 문조와 신정익황후 조씨의 합장릉이다. 수릉 이전의 왕릉은 일반적으로 봉분 앞이 초, 중, 하계 3단의 높이로 나뉘어, 중계에는 문석인이, 보다 낮은 하계에는 무석인이 배치되었다. 그러나 수릉에서는 중계와 하계가 합쳐져 문석인과 무석인이 같은 공간에 배치된다. 이는 신분제도의 변화에 의한 것이며, 이러한 상설제도는 『국조상례보편(國朝喪禮補編)』에 따라 영조 때부터 따르게 되었다.
문석인은 금관조복에 얼굴이 길쭉하고 눈과 입술이 선적으로 가늘게 표현되었다. 어깨를 움츠리고 목을 앞으로 빼고 있는 형태에서 조선시대 후기 인물조각의 전형성을 볼 수 있다.

 왼쪽은 혼령이 가는 길이고 오른쪽은 왕과 신하가 다녔던 길이라고 하네요..

 

 이 계단 역시 왼쪽이 혼령이 오르는 길이구여 왼쪽이 왕과 신하가 오르는 계단이라고 합니다.

오를때 오른발 부터 오른다고 하네요...ㅎㅎㅎㅎ

 

 

 비각.

 

 효명세자가 1830년(순조 30) 승하하자 성북구 석관동 의릉 왼쪽 언덕에 세자의 무덤형식인 원(園)으로 능을 조영하고, 연경묘라고 하였다. 그 후 효명세자의 아들 헌종이 1835년 즉위하자 그를 익종으로 추존하고 능의 이름을 수릉이라고 하였다. 1846년(헌종 13)에는 풍수상 불길하다는 의논이 제기되어 천장하기로 하고, 현궁을 발굴하여 정자각에 봉안하였다. 그리고는 그 해 5월 19일에 발인하여, 20일에 양주 용마산 아래로 천장하였다. 1855년(철종 6) 8월에 다시 능을 발굴하여 건원릉 좌측 언덕으로 천장하였다. 1890년(고종 27)에는 춘추 83세로 승하한 신정왕후를 수릉에 합장하여 모셨다. 1899년(광무 3)에는 익종은 문조익황제로, 신정왕후는 신정익황후로 다시 추존되었다.

 

 

 

 

 

 

 현릉에는 5대 문종과 그의 비 현덕왕후가 잠들어 있다. 이렇게 왕과 왕비를 한 능에 묻는 경우에는 다양한 양식이 존재한다. 현릉의 예처럼, 같은 능의 이름 아래 있지만, 왕과 왕비의 능을 각각 다른 언덕 위에 따로 만든 능을 동원이강릉이라고 한다. 정자각에서 능을 바라보았을 때 왼쪽 위의 언덕에 있는 능이 문종의 능이고, 오른쪽 언덕의 능이 현덕왕후의 능이다. 홍살문을 비롯하여 정자각, 비각 등을 하나씩만 만들어놓아 이 능이 동원이강임을 나타내고 있다.
현릉의 능제는 『국조오례의』의 본이 된 세종대왕의 예전 능의 제도를 따랐다. 병풍석에서는 이전 왕릉에 있던 방울과 방패 무늬가 사라졌고 구름무늬가 도드라진다. 고석도 4개로 줄었다. 제일 아랫단에는 장검을 두 손으로 짚고 서 있는 무석인이 있는데 머리와 눈, 코가 매우 크게 표현되었다. 문석인도 튀어나온 눈과 양쪽으로 깊이 새겨진 콧수염이 이국적이다. 신도비는 임금의 치적이 국사에 실리기 때문에 굳이 사대부처럼 신도비를 세울 필요가 없다는 의논에 의해서 이때부터 건립하지 않았다.

 

 5대 문종은 왕위에 오른 지 3년 만인 1452년(단종 즉위) 5월에 경복궁 정전에서 승하하였다. 건원릉의 남동쪽에 현릉을 조성하였다. 능지를 정할 때에는 수양대군, 왕보인, 김종서, 정인지 등의 대신을 비롯하여 풍수학랑관이 현지를 답사하고 정하였다. 그의 비인 현덕왕후 권씨는 문종이 승하하기 11년 전에 이미 세상을 떠났다. 1441년(세종 23) 단종을 낳고 병이 위독해져 24세의 나이로 문종보다 먼저 승하하였는데, 안산의 소릉에 장사지냈다. 이후 단종의 복위 사건에 의해 1457년(세조 3) 추폐되었다가 1512년(중종 7) 복위되어 그 다음해 봄, 문종이 묻혀 있는 현릉의 왼쪽 산줄기 언덕에 천장하였다. 사후 72년 만에 왕의 곁으로 돌아온 것이다. 이렇게 하여 동원이강릉을 조성한 후에는 정자각을 두 능의 중간 지점으로 이건하였다. 이 때 양릉 사이에 소나무가 빽빽하게 있었는데, 능역을 시작하자 저절로 말라 죽어 두 능 사이를 가리지 않게 되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건원릉 입구.

 

 

 건원릉은 조선 1대 태조의 능으로, 조선 왕릉 제도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다. 기본 능제는 전체적으로 고려 공민왕의 현릉을 따르고 있으나, 고려 시대에는 없던 곡장을 봉분 주위에 두르는 등 세부적으로 석물의 조형과 배치 면에서 일정한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석물의 조형은 남송 말기의 중국풍을 거의 따르고 있다. 봉분에는 다른 왕릉들처럼 잔디를 심지 않고 억새풀을 덮었는데, 고향을 그리워하는 태조를 위해 태종이 고향에서 흙과 억새를 가져다 덮어주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높고 웅장한 봉분의 아래 부분은 다양한 문양을 새긴 12면의 화강암 병풍석이 둘러싸고 있다. 병풍석에는 열 두 방향의 악재로부터 왕릉을 보호하기 위해 십이지신상을 새겼다. 병풍석 밖으로는 12칸의 난간석을 둘렀고, 난간석 밖으로는 석호와 석양이 네 마리씩 교대로 배치되어 있다. 석호와 석양은 왕을 지키는 영물들로, 밖을 향하여 언제든지 방비할 수 있는 준비 태세를 갖추고 있다. 봉분 앞에는 혼유석이 있는데, 혼유석 밑에는 도깨비가 새겨진 북 모양의 고석 5개가 놓여 있다. 한 단계 아래쪽에는 장명등과 석마 한 필씩이 딸려 있는 문석인이 놓여 있고, 그보다 더 아래쪽으로는 무석인과 석마가 양쪽에 놓여 있다.

 

 릉에 들어가기 전에 왕이나 신하가 먼저 예를 올리는 곳이라고 합니다.

 

 

 

 

 

 태조의 제향일에 제일로 바문객이 많다고 합니다.

 

 수라간 터.

 

 

 
1408년(태종 8) 태종은 1대 태조의 건원릉을 조성하였다. 태조는 1408년 5월 24일 창덕궁 광연루 별전에서 74세로 승하하였다. 그해 6월 12일 검교 판한성부사 유한우, 전 서운정 이양달, 영의정 하윤 등이 원평, 봉성, 행주 등의 길지를 후보지로 내세웠으나 채택되지 못하였고, 6월 28일 지금의 구리시인 양주의 검암에 산릉지를 정하였다.7월 5일에 충청도에서 3,500명, 황해도에서 2,000명, 강원도에서 500명 등 총 6,000명의 군정을 징발하여 7월 말을 기하여 산릉의 역사를 시작하게 하고 석실을 만들게 하였다. 그리고는 9월 7일 임금이 백관을 거느리고 빈전에 나아가 견전례를 행하고 영구를 받들어 발인하였다. 태조는 생전에 계비 신덕왕후와 함께 묻히기를 원해 신덕왕후의 능인 정릉(貞陵)에 자신의 묏자리를 마련해두었다. 그러나 그의 뒤를 이은 태종은 부왕의 유언을 따르지 않고, 신덕왕후의 능을 도성 밖으로 이장하고, 태조의 능을 지금의 자리에 조성하였다.

 

 태조 이성계가 고려의 중앙 정계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은 1361년(고려 공민왕 10) 홍건적의 침입 때이다. 그는 개경이 함락되자 사병 2,000명을 거느리고 수도 탈환 작전에 참가, 전공을 세움으로써 이름을 떨쳤다. 그 후로도 함흥평야에서 원나라 장수 나하추를 격파하는 등 다양한 공을 세워 나라의 두터운 신망을 얻게 되었다.
이 무렵 명나라에서 철령 이북의 땅을 지배하겠다는 통보를 보내오자, 고려 조정은 요동을 정벌하여 이를 견제하고자 했고, 최영 중심의 찬성파와 이성계 중심의 반대파가 서로 대립하게 되었다. 결국 최영의 주장에 따라 1388년(고려 우왕 14) 요동정벌이 단행되었는데, 이성계는 이 대열에 합류하였다가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반대파를 제거하고 우왕을 폐한 뒤, 창왕을 옹립하였다.
그로부터 4년 뒤인 1392년 7월 17일 수창궁에서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왕으로 등극한 다음해에는 국호를 ‘조선’이라 하고 한양으로 천도하였으며, 새 왕조의 기반을 튼튼히 다지는데 몰두하였다. 명나라와의 친선을 도모하기 위한 사대정책을 썼고, 숭유배불 정책을 내세웠으며, 농본주의를 통해 농업을 장려하였다.
그러나 아들들의 권력 다툼이 화를 불러일으키자 정치의 뜻을 버리고 서울을 떠나 고향인 함흥으로 돌아갔다. 만년에는 불도에 정진하다가 1408년(태종 8) 5월 24일 창덕궁 별궁에서 74세의 나이로 승하하였다.

‘심부름을 보냈는데 감감무소식인 사람’을 일컬어 흔히 함흥차사라고 한다. 함흥차사는 원래 태종이 ‘함흥에 있는 이성계를 모셔오기 위해 보낸 사신’을 가리키는 것이다. 세자 책봉에 불만을 품은 이방원(훗날 태종)이 왕자의 난을 일으켜 정국을 어지럽히자, 태조는 왕위에서 물러나 한양을 떠났다. 방원이 왕위에 오른 후로는 문안을 위하여 태조에게 차사를 보냈으나, 그 때마다 돌아오지 않아 ‘함흥차사’라는 말이 생겨났다고 한다. 야사에 따르면 태종이 차사를 보낼 때마다 태종에게 몹시 화가 난 이성계가 이를 모조리 죽여 버렸다고 하나, 이는 역사적 사실과는 다르다. 1차 왕자의 난 이후 이방원에 대한 분노를 삭히지 못한 태조는 경기도 양주 땅에 있는 회암사와 강원도 오대산, 함경도 안변, 항주 등으로 다섯 번이나 홀연히 한양을 떠났다. 이때마다 태종은 이성계에게 차사를 보내어 그의 마음을 위로하고 돌아올 것을 종용하였는데, 그 중에서 희생된 사람은 마지막 차사인 박순과 내관 노희봉 뿐이며, 이들도 이성계에 의해 죽임을 당한 것이 아니라 반란군에 의해 희생된 것이다. 함흥차사에 관한 이야기는 후세에 와서 호사가들이 태종과 태조의 갈등을 극대화시키기 위해 부풀린 것이다.

 

 

 

 건원릉을 제외한 다른 조선왕릉의 봉분은 푸른 잔디가 덮여 있으며 반듯하게 손질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조선을 세운 태조의 위엄있고 웅장한 건원릉에는 언뜻 보면 마치 한동안 손보지 않아 잡초가 무성한 것으로 여겨질 만큼 잔디가 아닌 억새풀이 무성하다. 왜 그럴까? 『인조실록』1629년(인조 7) 3월 19일의 첫 번째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건원릉 사초(莎草 : 무덤에 잔디를 입히는 것)를 다시 고친 때가 없었는데, 지금 능에서 아뢰어 온 것을 보면 능 앞에 잡목들이 뿌리를 박아 점점 능 가까이까지 뻗어 난다고 합니다. 원래 태조의 유언에 따라 고향의 억새풀을 사초로 썼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다른 능과는 달리 사초가 매우 무성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나무뿌리가 그렇다는 말을 듣고 어제 대신들과 논의해 보았는데, 모두들 나무뿌리는 뽑아버리지 않으면 안 되고, 사초가 만약 부족하면 다른 사초를 쓰더라도 무방하다고들 하였습니다.”

“한식(寒食)에 쑥뿌리 등을 제거할 때 나무뿌리까지 뽑아버리지 않고 나무가 큰 뒤에야 능 전체를 고치려고 하다니 그는 매우 잘못된 일이다. 지금이라도 흙을 파서 뿌리를 잘라버리고 그 흙으로 다시 메우면 그 뿌리는 자연히 죽을 것이다. 예로부터 그 능의 사초를 손대지 않았던 것은 다른 뜻이 있어서였던 것이니 손을 대서는 안 된다.”

인조의 언급에서처럼 태조의 건원릉에 잔디가 아닌 억새풀이 덮여있는 까닭은 태조의 특별한 유언 때문이다. 태조는 조선을 건국하는 위업을 이뤘지만, 그 후 왕자들이 형제간의 살육을 마다하지 않으며 벌이는 권력 다툼을 겪는 등 무거운 마음의 짐을 안은 채 말년을 보내야 했다. 승하하기 전 태조는 왕 이전의 한 사람으로서 고향을 그리워하며 고향 땅의 흙과 풀 아래 잠들고 싶은 마음을 유언으로 남긴 것이다.

 

 

 

 

 

 장렬왕후는 인조의 계비이다. 1624년(인조 2) 인천부사이던 한원부원군 조창원의 딸로 태어났으며, 15세의 나이로 1638년(인조 16) 12월 2일 인조의 계비로 간택되어 어의동 본궁에서 가례를 올리고 왕비로 책봉되었다. 1649년(인조 27)에 인조가 승하하고 효종이 즉위하자 26세의 나이로 대비가 되었으며, 1651년(효종 2) 자의(恣懿)의 존호를 받았다. 1659년(효종 10) 효종이 죽자, 효종에 대한 복상(服喪)문제로 서인, 남인 간에 대립이 생겼는데, 서인의 승리로 기년복(朞年服)을 입었다. 1674년(현종 15) 며느리인 효종비 인선대비(仁宣大妃)가 죽자 다시 복상문제가 일어났다. 서인은 대공설(大功說), 즉 9개월 복상을 주장하였고, 남인은 기년설, 즉 1년 복상을 주장하였는데, 이번에는 남인이 승리하여, 서인이 조정에서 물러나고 조대비는 1년 복상을 하였다. 자의대비는 효종, 현종, 숙종 대까지 4대에 걸치는 동안 왕실의 어른으로 지내며 천수를 누리다가 1688년(숙종 14) 8월 26일 65세로 소생 없이 창경궁 내반원에서 승하하였다.

 어린 나이에 인조의 계비로 궁에 들어와 남편을 일찍 여읜 장렬왕후는 효종, 현종, 숙종 3대의 왕이 인조의 뒤를 잇는 동안 자의대비라는 이름 아래 왕실의 어른으로서의 삶을 살았다. 그러나 본의 아니게 복제와 예송의 대상이 되어 서인과 남인의 당쟁을 불러일으키게 되었다. 성리학에 근거한 상례에 따르면 맏아들이 죽었을 때는 부모가 3년 상의 상복을 입고, 차남의 상에는 1년 동안만 상복을 입도록 되어 있다. 그런데 1659년(효종 10) 5월 4일 인조의 둘째 아들인 효종이 갑자기 승하하자, 효종의 계모인 자의대비 조씨가 상복을 얼마동안 입어야 할 것인가를 두고 서인과 남인이 대립하게 된다. 서인은 1년 상복을 주장하였고, 남인은 효종이 인조의 맏아들은 아니지만 왕위를 계승했으므로 장자의 대우를 하여 자의대비가 3년상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대립한 것이다. 이 논쟁은 결국 장자와 차자의 구별 없이 1년복을 입게 한 규정에 따르는 것으로 결말지어졌고, 이로 인해 1년복을 주장했던 서인이 논쟁에서 승리한 셈이 되어 세력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자의대비의 며느리이자 효종의 비인 인선왕후가 승하하자 이 논쟁이 다시 불거졌다. 이를 2차 예송논쟁이라고 하는데, 여기서 서인은 역시 인선왕후를 둘째 아들 며느리로 여겨 9개월 상복을 주장했고, 남인은 중전이므로 첫째 아들 며느리 대우를 하여 1년 상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때 현종은 남인의 주장을 채택하여 서인 정권을 몰락시키고 남인 정권이 세력을 잡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영조는 숙종의 둘째 아들로, 어머니는 화경숙빈(和敬淑嬪) 최씨이다. 1699년(숙종 25) 6세 때 연잉군에 봉해지고, 경종이 숙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1721년에 경종의 건강이 좋지 않고 아들이 없는 것을 이유로 왕세제에 책봉되었다. 당시 그의 왕세제 책봉을 주장하는 노론과 시기상조론을 들어 반대한 소론 간의 정쟁이 극심했으며, 영조 자신도 이 소용돌이에 휘말려 경종을 시해하려는 시도에 가담했다는 모함을 받기도 하였다. 1724년 이러한 치열한 정쟁 속에 즉위한 영조는 붕당의 대립 자체를 완화, 해소하는 것을 왕정의 큰 과제로 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즉위와 동시에 왕권을 강화하고, 균형 있는 인재 등용을 통하여 탕평세력을 구축하였다. 영조는 탕평 정치로 조정 뿐 아니라 백성들에게 고통을 주는 여러 가지 폐단을 고치는 개혁 조치를 단행했다. 특히 백성들에게 큰 부담이 되어온 양역조의 양을 감소시키는 균역법을 시행하고, 노비 신공을 혁파하는 등 획기적인 조치를 취하였다. 과감하고 개혁적인 조치들을 단행하여 조선 후기 나라의 기틀을 재차 다지는데 큰 공을 세웠으나, 1762년(영조 38)에는 세자에 대한 지나친 기대와 벌열의 움직임에 대한 과도한 경계심으로 세자를 뒤주 속에 가두어 죽이는 참사를 빚기도 하는 등, 당쟁의 혼란을 완전히 잠재우지는 못하였다. 1776년(영조 52) 3월 5일 춘추 83세로 경희궁 집경당에서 승하하였다.

 

영조는 무수리에게서 태어난 숙종의 서자이다. 비록 왕자이긴 하였으나 어머니의 신분 때문에 왕위에 오르기 전에는 궁궐 외곽의 초라한 집에서 천시 받으며 어렵게 성장하였다. 영조의 어머니는 숙종이 승하하기 이전에 일찍 세상을 떠나 빈(嬪)의 대우도 받지 못했고, 양주땅 고령산 기슭에 묻혔는데, 그 묘가 매우 초라하였다. 궁중예법에 따라 능호나 원호를 붙일 수도 없었다. 이 사실이 늘 맘에 걸렸던 영조는 오랜 노력 끝에 어머니의 묘를 간신히 소령원(昭寧園)으로 승격시키는데 성공하였다. 하루는 영조가 미복 차림으로 궁을 나와 산책하던 중에 시골의 나무꾼이 향나무를 팔고 있는 것을 보았다. 영조가 향나무를 어디서 캐온 것이냐고 물으니, 무식한 나무꾼은 제 앞의 임금을 몰라보고, 나라님의 모후를 모신 소녕릉이 있는 고령 양주산에서 캐온 나무라고 설명해주었다. 나무꾼은 능과 원을 구별하지 못하여 능이라고 부른 것이지만, 오랜 세월 어머니의 묘를 능으로 꾸며드리고 싶었던 영조는 나무꾼의 ‘소녕릉’ 소리에 감격하였다. 그리하여 나무꾼이 팔던 향나무를 비싼 값에 쳐주고, 그를 소녕원 능참봉에 제수하였다. 영조는 강하고 결단력 있는 군주였으나, 내면으로는 자신의 출생 신분과 정통성에 대한 콤플렉스, 어머니에 대한 안타까움과 정쟁에 휘말려 아들을 죽일 수밖에 없었던 사연 등 평생 큰 아픔을 삭여야 했다.


 

 

 헌종은 순조의 손자이자 후에 익종으로 추존된 효명세자와 신정왕후 조씨의 장남이다. 4세 때인 1830년(순조 30) 5월 6일 아버지 효명세자를 여의고, 그 해 9월 왕세손에 책봉되었다. 1834년 11월 13일 순조가 승하하자 헌종은 경희궁 숭정문에서 즉위했다. 헌종은 8세의 어린 나이로 할아버지인 순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으므로 실제의 정사는 할머니이며 순조비인 안동 김씨 순원왕후가 수렴청정하게 되었다. 11세가 되던 1837년(헌종 3) 3월에는 안동 김씨인 김조근의 딸을 세자빈으로 맞았다. 이들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는 왕실 외척으로서 서로 대립하며 세도 정치를 주도하였다. 뿐만 아니라 두 차례에 걸친 역모 사건이 발생하고, 천주교에 대한 박해 문제와 관련하여 외국 군함이 처음으로 조선 근해에 나타나 민심이 흉흉했다. 또한 국가 재정의 3대 요소인 전정, 군정, 환곡 삼정의 문란으로 인해 백성들은 큰 부담을 안고 살아가야 했다. 이러한 혼란스러운 정국 속에서 15세의 나이에 친히 수렴청정을 거두고 정사를 돌보기 시작한 헌종은 『동문휘고』, 『열성지장』, 『동국사략』, 『삼조보감』등을 완성하였으며, 각 도에 제언을 수축하게 하는 등의 치적을 쌓았다.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헌종은 두 명의 왕후와 세 명의 후궁을 두었다. 1838년(헌종 4) 간택령을 내려 효현성황후를 왕비로 맞이하였으나, 몇 년이 지나지 않아 자식 없이 요절하였다. 그 후 계비를 맞아들이기 위하여 스스로 간택에 참여하였다가 훗날의 경빈 김씨를 마음에 두게 된다. 그러나 간택의 결정권은 왕실의 어른인 대왕대비에게 있었고, 경빈 김씨가 아닌 홍재룡의 딸 명헌왕후 홍씨가 최종 간택되었다. 이에 헌종은 3년을 고심한 끝에 왕비가 후사를 생산할 가능성이 없다는 핑계로 대왕대비의 허락을 받아 삼간택에서 낙선한 경빈 김씨를 후궁으로 맞아들였다. 간택후궁은 종2품 숙의로 책봉하는 관례를 무시하고 경빈 김씨를 바로 정1품 빈에 책봉하고, 1847년(헌종 13) 창덕궁 서쪽에 별궁인 낙선재를 지어주기까지 하였다. 예술을 사랑한 헌종은 경빈 김씨와 함께 이 별궁에서 고금 명가의 유필을 벗 삼아 지내기를 좋아하였다. 낙선재에 여러 차례 불려 들어갔던 조선 후기 서화가 소치 허유(許維)의 기록에는 낙선재는 헌종이 평상시 거처하는 곳이며, 추사 김정희의 글씨로 쓰여진 현판이 가득하다는 등의 묘사가 잘 드러나 있다. 그러나 헌종은 이곳에서 예술과 사랑을 누리는 생활을 2년도 채 하지 못하고, 혼란스러운 정국을 뒤로 하고 1849년(헌종 15) 6월 6일 23세의 어린 나이로 생을 마감하게 되었다.

 

 

 

 단의왕후는 1686년(숙종 12) 5월 21일 회현동에서 청은부원군 심호의 딸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유순하면서도 의젓하였으며 타고난 지혜로움이 있었다. 1696년(숙종 22) 11세의 어린 나이에 세자빈으로 간택되었다. 간택에 참여하고 집에 돌아간 후에는 손수 술과 음식을 장만하여 집안의 여러 사람들에게 대접했으며 두 번째 간택하던 때는 종일토록 눈물을 흘리며 부모의 곁을 떠나는 것을 슬퍼했다고 한다. 별궁에 들어와 거처하게 되자 하루 종일 단정하게 앉아서 잠시라도 함부로 기대거나 나태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고, 시녀들이 궁궐 구경하기를 청해도 따르지 않고 『소학(小學)』을 읽었다. 이와 같은 타고난 의젓함과 총명함으로 궁궐의 어른들과 병약한 세자를 섬기는 데 손색이 없었다고 전하는데, 경종이 즉위하기 2년 전인 1718년(숙종 44) 2월 7일 병을 앓다가 33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그리고 그 해 4월 18일 숭릉 왼쪽 산줄기에 안장했으며, 1720년 경종이 즉위하자 왕비로 추봉했다.

 

 

 단의왕후는 어려서부터 슬기롭고 의젓하면서도 유순했으며, 첫 돌이 지나기 전에 말을 했다고 기록은 전한다. 또한 놀이를 하더라도 반드시 법도가 있었으며, 3세 때 할머니를 공양하는데 정성과 효도가 돈독하고 지극했다고 한다. 말은 항상 단정하고 조심스럽게 했고, 물건을 처음 보면 희귀한 것이 아니더라도 반드시 어른에게 먼저 바쳤으며, 비록 맛있는 음식이 있더라도 어른이 먹으라고 명하지 않으면 멋대로 음식에 손을 대지 않았다. 그리고 아침에 일어나면 항상 어른들께 문안인사를 드렸다. 단의왕후가 5세 때이던 어느 여름날, 아버지 심호가 술에 취해 낮잠을 자면서 딸에게 부채를 들고 파리를 쫓게 한 적이 있었는데, 그녀는 저녁때가 되도록 아버지 곁을 떠나지 않고 지켰다. 그래서 심호는 그 딸을 매우 기특하게 여기고 사랑하여 항상 가인들에게 이를 칭찬했다고 한다. 또한 그녀는 천성이 간소한 것을 좋아하여 남이 좋은 옷을 입더라도 부러워하지 않았으며, 좋은 것이 생기더라도 반드시 여러 동생들에게 모두 나누어주는 등 물건에 대한 욕심이 없었다.

현종은 효종과 인선왕후의 아들로, 효종이 세자의 몸으로 청나라 심양에 볼모로 잡혀가 있던 1641년(인조 19) 2월 4일 그곳에서 태어났다. 조선 역대 왕 중에 유일하게 외국에서 출생한 왕이다. 1649년(인조 27) 소현세자가 급작스럽게 승하하자 효종이 세자에 책봉되는 동시에 현종도 함께 세손을 책봉되었고, 그 해 5월에 인조가 승하하고 효종이 왕위를 잇자 세자 자리에 올랐다.1651년(효종 2) 11세의 나이로 청풍부원군 김우명의 딸과 가례를 올렸고, 1659년(현종 즉위) 5월 효종이 승하하자 19세의 나이로 창덕궁 왕위에 올랐다. 재위 기간 동안 현종은 함경도 산악지대를 개척하고, 실효성이 없다고 판단된 북벌정책을 중단시켰으며, 호남 지방에 대동법을 시행하였다. 동철활자 10만 자를 주조시켰으며, 천문 관측과 역법 연구를 위하여 혼천의를 다시 제작하게 하는 등 다양한 업적을 남겼다. 그러나 효종의 상에 자의대비 조씨가 어떠한 상복을 입어야 하는가에 대한 서인과 남인의 계속된 논쟁으로 말미암아 국력이 쇠퇴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현종은 1674년(현종 15) 8월 18일 34세의 나이로 창덕궁에서 승하했다. 재위 기간은 15년이었다.

 

현종은 어려서부터 효심이 지극하고 사려가 깊었다. 청나라 심양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나이에 부모보다 먼저 본국으로 먼저 돌아왔는데, 해가 떠오르는 것을 볼 때마다 하루 빨리 아버지인 효종이 돌아오기를 기도하였다. 새로 맛있는 음식을 대할 때, 효종이 있는 지방에서 생산되지 않는 것이면 바로 보내게 하고 나서야 맛을 볼 정도로 부모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컸다고 한다. 어린 현종이 어진 인정을 베푸는 대상은 부모 뿐만이 아니었다. 한번은 그의 할아버지인 인조가 방물(方物)을 받다가 표범 가죽의 품질이 나빠서 되돌려 보내려고 하였다. 이 때 현종의 나이 7세였는데 곁에 있다가 말하기를, “표범 한 마리를 잡으려면 아마도 사람이 많이 다칠 듯합니다.”하니, 인조가 그 뜻을 가상히 여겨 돌려보내지 말라고 명하였다. 하루는 궁중에서 나오다가 추위에 얼고 굶주린 궐문 밖 군졸을 보고는, 탄식하며 옷과 식량을 제대할 때까지 제공해주라고 명령하고서야 자리를 떴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어린 현종의 이러한 효성과 자애로움은 할아버지인 인조에게 큰 신임을 안겨주었다.

 

 

 

 

 

아들과 함께 역사의 흐름을 조금이나마 짚어보는 계기가 되지 않았나 합니다.

가끔 이런 시간을 갖도록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올만에 아들과 즐거운 시간 넘 좋았네요....ㅎㅎㅎㅎ

 

참고자료 : 문화재청 동구릉관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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