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군 삼산면 매음리 629번지 낙가산에 있는 사찰로 강화도 서쪽의 석모도에 있으며 양양낙산사와 금산보리암과 함께 우리나라 3대 해상 관음 기도도량으로서
신라 선덕여왕 4년(635)년에 회정대사가 금강산에서 수행하다가 이 곳에 와서 절을 창건하였는데, 관세음보살이 상주한다는 산의 이름을 따서 산의 이름을 낙가산이라고 하였고, 중생을 구제하는 관세음보살의 원력이 광대무변함을 상징하여 절의 이름을 보문사라고 하였다고 한다.
보문사 창건 전설이 내려져 오는데 전설은 신라 선덕여왕 4년(635)에 한 어부가 바다에 그물을 던졌는데, 사람 모양의 돌덩이 22개가 한꺼번에 그물에 걸렸다. 고기를 잡지 못해 실망한 어부는 돌덩이를 바다에 버리고 다시 그물을 쳤는데 또 다시 바로 그 돌덩이들이 걸리게 되자, 어부는 또 다시 그 돌덩이를 바다에 버렸고, 돌이 두번이나 그물에 걸리게 되자 그만 집으로 돌아가 버렸다고 합니다. 그날 밤 어부의 꿈에 한 노승이 나타나서, 낮에 그물에 걸렸던 돌덩이는 천축국에서 보내온 귀중한 불상인데, 바다에 두번이나 버렸다고 질책하고, 내일 다시 그곳에서 불상을 건져서 명산에 봉안해 줄 것을 당부하였답니다. 다음 날, 23개의 불상을 건져올린 어부는 꿈 속에서 노승이 당부한 대로 낙가산으로 불상을 옮겼는데, 현재의 보문사석굴 앞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불상이 무거워져서 더 이상 옮길 수 없었고 그리하여, 석굴이 불상을 안치할 신령스러운 장소라고 생각하고, 굴 안에 단을 만들어 모시게 되었다고 전해져 내려 옵니다.
보문사 일주문.
보문사 일주문처럼 대개는 목조 건물 형식을 띠고 있다. 칸수는 한 칸이고 지붕은 팔작지붕이며 현판에 쓰여진 `낙가산 보문사'라는 글씨는 여초(如初) 김응현(金膺顯)의 작품이라고 합니다.
공덕비와 약수터.
전통찻집 감로다원.
찻집.
마에관음좌상.
보문사가 관음 도량의 성지임을 가장 잘 상징하는 성보문화재로서, 사람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고 있다. 그리고 이곳에서는 멀리 서해바다가 한 눈에 조망되는 등 경치가 장관이고 특히 낙조(落照) 경관은 아주 일품이어서 수평선 너머로 떨어지는 붉은 해와 노을을 쳐다보노라면 종종 그야말로 무아지경 불심(佛心)의 경지에 들곤 한다.
이 관음좌상은 대웅전과 관음전 사이에 있는 계단을 따라 한 10분 가량 올라가면 나오는 낙가산 중턱의 눈썹바위 아래에 새겨져 있다. 절에서부터의 거리는 약 1km가량 된다. 오르는 길이 제법 가파르기 때문에 계단은 지그재그 식으로 놓았다. 이 불사를 기념하는 `관음성전계단불사공덕비'가 중간에 놓여 있다. 계단이 놓여졌다고는 하나 눈썹바위로 올라가는 길 자체가 워낙 급한 까닭에 한달음에 올라갈거리는 못된다. 가다 보면 제법 다리에 힘도 들고 허리가 뻣뻣해지기도 한다. 이럴 때 `관세음보살'을 마음속으로, 혹은 나지막이 외우며 올라가노라면 문득 어느새 관음보살님 앞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이 마애관음좌상은 1928년 배선주 주지스님이 보문사가 관음 성지임을 나타내기 위하여 금강산 표훈사(表訓寺)의 이화응(李華應)스님과 더불어 이곳에 새긴 것으로, 크기는 높이 920cm, 너비 330cm에 달하는 거상(巨像)이다.
크기를 척수로 환산하면 높이 32척에 너비가 11척이 되는데, 이것은 곧 관음보살의 32응신(應身)과 11면(面)을 상징한다고 한다.
이 관음 좌상 약간 비스듬히 나 있는 바위면에 새겨졌는데, 위의 바위가 마치 지붕처럼 돌출되어 있어 비바람으로부터 관음부처님을 가려 주고 있다.
관음 좌상의 양식을 보면, 네모진 얼굴에 커다란 보관을 쓰고 두 손을 모아 정성스레 정병(淨甁)을 받쳐든 채 연화대좌 위에 앉아 있다. 얼굴에 비해 다소 크게 느껴지는 코 입 귀는 투박하기는 하지만 그만큼 서민적이라 보는 사람의 마음도 푸근해지 며 정감이 간다. 또 부처님 얼굴에 빠짐없이 있기 마련인 백호(白毫)도 이마 사이에 솟아 있다. 가슴에는 `만(卍)'자가 새겨져 있다.
불의(佛衣)는 양쪽 어깨를 모두 감싸도록 입는 통견(通肩)을 무릎 아래로 흘러내리고 있다. 연화대좌 왼편, 그러니까 관음을 바라보아 오른쪽에는 `조불화응선사(造佛華應禪師)'가 그리고 그 반대편 위패 모양으로 새긴 구획 안에도 `화엄회상필부사왕중(華嚴會上八部四王衆)·나무화엄회상욕색제천중(南無華嚴會上欲色諸天衆)·화엄회상호법선신중(華嚴會上護法善神衆)' 등의 글씨가 세 줄로 새겨져 있다.
이 관음상은 비록 작품이 오래된 것은 아니지만, 이곳이 관음 도량의 성지인 동시에 기도(祈禱) 성지임을 나타내는 상징성에서 그 의의를 찾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래서 이곳에서 정성으로 기도 드리면 이루어지지 않는 소원이 없다 하여 지금도 신도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현재 인천광역시유형문화재 제29호로 지정되어 있다.
범종각.
대웅전 앞에 위치하고 있고 1975년에 지어졌으며 안에는 그 당시 국내 최대의 범종이 봉안되어 있다. 이 범종은 1975년 당시 주지인 정수(正秀)스님의 발원으로 조성되었고 높이 215cm, 밑지름 140cm, 무게 5t이나 되며 조성 당시 국내 최대의 범종으로서 나라 안팎에 화제가 되기도 했다. 기본 형태는 국보 제36호인 오대산 상원사(上院寺) 동종과 국보 제29호 성덕대왕신종을 조화시켜 도안한 것이라고 합니다.
이 범종은 1975년에 고 육영수(陸英修) 여사가 화주하여 모셔진 것이라고 하며 `범종각'이라는 현판 글씨는 강화가 고향인 서예가 박세림(朴世霖, 1924∼1975)의 작품입니다.
보문사 맷돌.
맷돌은 옛날 절의 스님들이 취사용으로 사용하던 것으로 석실 입구 오른쪽 삼성각 올라가는 계단 옆 화단에 있으며 석재는 화강암인데, 전체적으로 돌 다듬은 솜씨가 부드럽고 또한 조각도 정밀한 편이고 둥근 모양을 한 밑부분으 주연(周緣)에는 흠이 널찍하게 파여져 있고, 맷돌질로 잘게 으스러진 음식물이 밑에 받치는 그릇에 흘러 잘 담아지도록 홈통도 적당한 너비로 파여 있다.
윗돌은 얇게 조성되었으며 역시 주연에 굵직한 테를 양각하고 그 양쪽을 파 놓아 그곳에 자루를 끼워 맷돌을 돌릴 수 있도록 만들어 놓았다.
현재 남아 있는 대부분의 맷돌은 웃돌, 곧 상대석만 남아 있는데 이 보문사 맷돌은 웃돌 뿐만 아니라 아랫돌, 곧 하대석까지 완전하여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또한 크기도 지름 69cm, 두께 20cm나 되어 보통의 것보다 두 배 가량 된다. 이 맷돌이 이용되던 시절 보문사가 얼마나 많은 스님과 신도들로 성황을 이루었는지 짐작할 만하다. 전체의 양식으로 보아 조선 시대 후기의 것으로 생각된다. 현재 인천광역시 민속자료 제1호로 지정되어 있다.
한편 맷돌 좌우에 크기가 비슷한 돌절구가 하나씩 있는데 이 역시 맷돌과 마찬가지로 취사용으로 쓰인 듯하다. 왼쪽 것은 높이 58cm, 입지름66cm, 깊이 30cm이고 오른쪽 것은 높이 53cm, 입지름 71cm, 깊이 30cm이다.
모문사 석실.
석실 안에 봉안된 23불의 나한상은 눈썹바위의 마애관음보살좌상과 더불어 보문사의 대표적 성보문화재로 널리 알려져 있다.
보문사가 관음신앙의 성지인 동시에 나한신앙의 대표적 도량이 된 것은 바로 이 석실에 있는 나한상 때문으로 보아 틀림없다. 그러므로 이 석실 및 안에 봉안된 나한상이 절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그만큼 높다. 또한 이 석실은 우리 나라에 흔치않은 석굴사원이기도 하다. 석굴사원의 예는 경주 석굴암, 경북 군위의 삼존석굴, 강원도 속초의 개조암(開祖庵) 등에서나 찾아볼 수 있을 정도로 우리나라에서는 몇 되지 않는 귀중한 예이다.
이 석실의 역사는 곧 보문사 창건 역사와 거의 일치한다. 전설에 따르면 창건 후 14년 뒤인 649년 신라 선덕왕 때 어부들이 고기잡이 나가다 그물에 걸려 올려진 석불상들을 이곳 동굴에 안치하였다고 하였으므로, 곧 이때부터 석실이 조성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 뒤의 역사는 알 수 없고, 조선 시대 후기에 들어서인 1812년(순조 12)에 한차례. 그리고 1867년(고종 4)에 다시 경산(京山)화상이 석굴을 보수했다. 그리고 근대에 들어와서는 1958년 춘성(春城)선사가 석굴 내부를 좀 더 확장하며 개수하였다. 최근에는 1980년 정수(靜守)스님이 내부를 다시 확장하는 한편 지금의 불단(佛壇) 뒤와 옆에 있는 석탱화를 조성하였다고 한다.
다음으로 석실의 구조를 보면, 내부는 천연 동굴을 확장하여 만들었고 입구에 무지개 모양을 한 3개의 아치형 홍예문(虹?門)을 달았다. 석굴 안은 면적이 30평으로 꽤 널찍한 편이다. 늘 이 곳에는 전국 각지에서 온 사람들의 기도음이 끊이지않고 이어지고있다.
석실앞 약수터.
삼성각.
삼성각(三聖閣)은 나한전 석실 뒤쪽 오른편에 있다. 1960년에 지어졌으며 최근 중수되었다. 정면 3칸, 측면 2칸에 팔작지붕 건물을 하고 있다. 내부 넓이는 처음 지어질 당시는 4평이 조금 못되었으나 지금은 좀 더 확장되었다.
위치는 경내보다 높게 축대를 이중으로 쌓은 곳에 자리하고 있으며 돌계단으로 오르내리도록 했다. 계단 옆에는 최근 조성한 석등 2기가 양쪽으로 있다.
안에는 불단은 놓여 있으나 불상 없이 가운데 칠성탱화를 중심으로 산신탱화 독성 탱화가 봉안되었고, 양쪽 내벽(內壁)에도 나한도가 각각 걸려 있다. 불단에 모셔진 칠성탱화 등은 모두 1992년에 봉안된 것이다.
삼성각 바깥쪽 벽 좌우에는 산신도 나한도 4폭이 그러져 있고, 정면 기둥에는 오른쪽부터 `영과광대혜감명(靈過廣大慧鑑明)'·`주재공중영무방(住在空中映無方)' `나열벽천임찰토(羅列碧天臨刹土)'·`주천인세수막장(周天人世壽莫長)'이라 쓴 주련(柱聯)이 각각 걸려 있다.
향나무
석실과 범종각 사이에 있는 큰 바위틈에 인천광역시 지방기념물 제17호로 지정된 향나무가 자라고 있다. 수령(樹齡)이 약 600년이나 된 노목(老木)으로 크기는 높이 32m, 땅 위 1.2m 부위의 둘레가 2.8m이다. 1.7m 높이에서 원줄기가 동서로 갈라져 둘레가 동쪽 것은 1.3m, 서쪽 것은 1.5m나 된다. 이 향나무는 6·25 당시 죽은 것같 이 보였다가 3년 뒤 다시 소생하였다고 한다.
범종각
대웅전 앞에 위치하고 있다. 1975년에 지어졌으며 안에는 그 당시 국내 최대의 범종이 봉안되어 있다. 이 범종은 1975년 당시 주지인 정수(正秀)스님의 발원으로 조성되었는데. 높이 215cm, 밑지름 140cm, 무게 5t이나 된다. 조성 당시 국내 최대의 범종으로서 나라 안팎에 화제가 되기도 했다. 기본 형태는 국보 제36호인 오대산 상원사(上院寺) 동종과 국보 제29호 성덕대왕신종을 조화시켜 도안한 것이다.
이 범종은 1975년에 고 육영수(陸英修) 여사가 화주하여 모셔진 것이라고 한다.
한편 `범종각'이라는 현판 글씨는 강화가 고향인 서예가 박세림(朴世霖, 1924∼1975)의 작품이다.
극락보전
현재 정면 5칸 측면 3칸의 커다란 규모로 보문사를 찾는 사람을 반기고있다.
극락보전의 내부 넓이는 약 60평이며, 이곳에 관음보살상을 포함해 3,000불이 모셔져있다.
극락보전 바로 아래에는 요사채가 있다. 그래서 경내에서 이 곳을 바라볼 때는 지상에 서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계단 아래 주차장 쪽에서 보면 2층 요사 건물 위 3층 되는 곳에 올려진 것으로 보인다. 곧 2층 요사 옥상 위에 세워진 셈이다.
요사채.
경내.
요사채.
종무소도 겸하고 있습니다.
마애불좌상 오르는길.
단체사진.
장독대.
석포리 앞바다.
보문사 한곳만 둘러 보기는 시간이 넘 짧고 해명산이나 낙가산 산행을 겸하면 좋은 여행이 될듯 합니다.
애들도 데리고 함 와야 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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