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 이야기

천년의 문화유산이 살아 숨쉬는곳 양주 회암사...

자연에 동화된 로드킹 2011. 9. 6. 17:23

 올만에 찾아간 회암사...

경기도 양주 천보산 자락에 있던 조선 최대의 사찰 회암사는 지금 폐허가 되어 옛모습을 확인하기 윈한 발굴이 진행중입니다.

 회암사는 인도 출신의 승려 지공선사가 창건하고 고려 후기의 승려 나옹선사 중건하여 조선시대 무학대사가 주지를 지낸 절이며,

조선 전기의 문정왕후 대에 승려 보우가 활약할 당시만 하더라도 조선 최대의 사찰이었다고 합니다.

지금 발굴이 진행중이나 이곳 회암사지에는 절집의 규모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크고 궁궐의 건축 양식이 발견되고 있는 점으로 보아

 조선 초기 태조가 이곳을 드나드는 과정에서 왕실 못지 않은 규모와 전각을 갖추었던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문정왕후 사후 급속히 몰락하여 성리학이 조선의 정치이념으로 굳어지는 조선 중기 이후에 완전히 폐사된 것으로 확인되고 있습니다.

200칸이 넘던 거대한 사찰이 언제 누구에 의해 갑자기 폐허가 되었는지는 지금도 풀지못한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고 합니다.

현재 회암사 북쪽 산위에는 10년 전에 새로 조성한 회암사가 그 명맥을 유지하기 위해 대웅전과 영성각, 삼성각 등이 새로 조성되어 있고 

 대웅전 동쪽 능선에는 무학대사와 지공선사, 나옹선사의 부도와 석등이 자리하고 있고 오른쪽 능선에는 나옹선사의 비가 있었는데,

불에 타고 지금은 기단과 귀부 만이 옛 영화를 되새기고 있습니다.

 

현재 회암사는 조계종 25대교구 봉선사의 말사로

지암 스님이 주지로 계십니다. 

 

 

이번에 새로 놓인 계단

 

 

 새로 조성된 공덕비

 

 운무에 휩쌓인 불곡산

 

 종무소

 

회암사 전경

 

 새로 조성된 대웅전이 보입니다.

 

 

 잔디가 인상적이죠.

 

 조사전

 

 지공선사 부도및 석등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49호

비의 총높이는 365cm로 네모꼴 받침돌 위에 홈을 파서 비신을 세우고 팔작지붕 모양의 옥개석(屋蓋石)을 얹은 형식입니다.

원래 1387년에 세웠던 것이 도중에 파괴되어 1828년에 다시 조성하였습니다.

비 옆에는 비신을 올려놓는 흠이 없는 거북받침돌인 귀부(龜趺)가 하나 남아 있습니다.

 

무학대사 홍융탑 

보물 제388호
지정일
1963.09.02
소재지
경기 양주시 회암동 산8 회암사
시대
조선시대

회암사는 고려 충숙왕(1328)때 지공(指空)이 창건하여 조선 순조 때인 1800년대에 폐사된 사찰이다.

조선 전기 왕실의 보호를 받던 절로서 태조 이성계가 늙은 후에 머무르면서 수도하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절터의 북쪽 능선 위에 지공, 나옹의 승탑과 함께 서있는 이 부도는 무학대사의 묘탑이다.

둘레에는 탑을 보호하기 위한 난간이 둘러져 있다.

회암사의 주지이기도 했던 무학은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활약한 승려로,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와의 관계로 더욱 알려지게 되었다.

이성계의 꿈을 풀이하여 왕이 될 것을 예언한 이야기와 한양천도와 관련된 설화 등은 특히 유명하다.

부도의 형태는 구름무늬를 조각한 8각의 바닥돌 위에 받침부분인 기단이 놓이고 탑신과 머리장식부분이 포개져 있는 모습이다.

기단의 아래·윗돌은 연꽃모양의 돌이고 가운데돌은 배가 불룩한 8각의 북모양으로 각 면에는 모양이 서로 다른 꽃조각이 도드라져 있다.

탑신은 몸돌이 둥근 모양으로 표면에 용과 구름이 가득 새겨져 시선을 모은다.

용의 머리와 몸, 비늘 등이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생동감있게 보이고 구름무늬가 한층 운동감을 느끼게 한다.

지붕돌은 8각으로 처마부분에는 목조건축을 흉내낸 모양들이 새겨져 있다.

경사는 급하며 추녀끝은 가볍게 들려있다.

지붕 꼭대기에는 둥근 돌 하나만 올려놓아 간소화된 형태를 보인다.

조선 전기의 양식을 보여주는 이 부도는 규모가 웅대하고 모양도 가지런하다.

무학대사묘비의 기록으로 미루어 1407년에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무학대사 홍융탑앞 쌍사자 석등 

보물 제389호
지정일
1963.09.02
소재지
경기 양주시 회암동 산8 회암사
시대
조선시대

회암사는 고려 충숙왕 때인 1328년에 승려 지공(指空)이 창건한 사찰로, 그 제자인 나옹이 불사를 일으켜 큰 규모의 사찰이 되었다.

조선 태조 이성계가 각별히 관심을 가졌으며, 왕위를 물린 후에도 이 곳에서 머무르며 수도생활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절터의 동쪽 능선 위에 지공과 나옹 그리고 무학의 사리탑이 남과 북으로 나란히 서있고, 그 남쪽 끝에 이 석등이 자리하고 있다.

바닥돌과 아래받침돌은 하나로 붙여서 만들었으며, 그 위의 중간받침돌은 쌍사자를 두어 신라이래의 형식을 따르고 있다.

쌍사자는 가슴과 배가 서로 붙어 입체감이 없고 엉덩이가 밑에 닿아 부자연스럽다.

윗받침돌에는 8개의 연꽃모양을 새겼다.

불을 밝혀두는 곳인 화사석(火舍石)은 2개의 석재를 좌 우에 놓아 그 간격으로 생긴 2개의 공간이 창의 구실을 하고 있다.

지붕돌은 두꺼우며 처마밑이 반원모양으로 들려 있고, 경사면은 네 귀퉁이가 두툼하게 도드라져 뚜렷이 표현되었다.

지붕돌 꼭대기에는 둥근 돌 위로 보주(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가 있다.

기본형이 4각인 형태로 삼국시대이래 고유의 8각 석등형태에서 벗어났다는 점이 주목되며,

청룡사터의 보각국사 정혜원륭탑전사자석등(보물 제656호)과 양식이 비슷한데,

만들어진 시기도 이와 같은 것으로 보아 조선 전기의 작품으로 추측하고 있다.

 

 무학대사 쌍사자 석든과 홍융탑

 

 무학대사비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51호
지정일
1974.09.26
소재지
경기 양주시 회암동 산8-1
시대
조선시대

회암사터에 세워져 있는 무학대사의 묘비로, 바로 뒷편에는 그의 묘탑(보물 제388호)이 함께 서 있다.

무학대사는 고려말·조선초의 이름난 승려로, 이름은 자초이고,무학은 그의 호이다.

18세에 출가하여 소지선사에게서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었으며, 혜명국사에게서 불교의 교리를 배운 후 묘향산에서 수도하였다.

조선 태조 원년(1392)에는 태조의 부름을 받고 그의 스승이 되어 도읍지를 물색하기도 하였다.

그 후 회암사에서 머물다가 금강산의 금장암이라는 암자에서 입적하였다.

비는 높직한 4각 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 지붕돌을 얹은 간결한 모습이다.

지붕돌의 네 귀퉁이는 하늘을 떠 받들 듯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위를 향하고 있다.

비문에는 대사의 일생이 적혀 있는데 특히 원나라에 들어가 지공선사와 나옹선사를 만나 그들의 제자가 된 일,

한양천도에 큰 역할을 한 일, 회암사에 두 스승의 묘탑을 세운 일 등이 잘 나타나 있다.

태종 10년(1410)에 왕명을 받들어, 변계량이 비문을 짓고 공부의 글씨로 하여 비문을 새겨두었다 하나,

순조 21년1821)에 파괴되었고, 순조 28년(1828)에 다시 비를 세워 오늘에 이르고 있다.

 

 

 나옹선사 부도및 석등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50호
지정일
1974.09.26
소재지
경기 양주시 회암동 산8-1
시대
고려시대

회암사 경내의 지공선사 부도 아래쪽에 있는 나옹선사의 부도와 석등이다.

나옹선사는 고려 후기의 승려로 본명은 혜근이다. 오대산 상두암에 머물렀고, 공민왕에게 설법을 하였다.

회암사의 주지가 된 후 절을 중창하였고, 우왕 2년(1376)에 입적하였다.

부도는 승려의 무덤을 상징하여 그 유골이나 사리를 모시는 곳으로, 이 부도는 나옹선사의 사리를 모시고 있다. 8

각을 기본형으로, 기단 위에 탑신을 올리고 머리장식을 얹은 모습이다. 3단을 이루는 기단의 가운데받침돌은 배가 불룩한 북모양을 하고 있다.

둥근 탑신의 몸돌은 아무런 조각없이 간결하다. 지붕돌은 경사가 완만하며, 네 귀퉁이에서 살짝 치켜 올려갔다.

지붕돌 위로는 하나의 돌로 조각한 머리장식이 놓여 있다.

석등은 4각을 기본형으로, 3단의 받침 위로 불을 밝히는 화사석(火舍石)을 올린 후 지붕돌과 머리장식을 얹은 모습이다.

화사석은 앞 ·뒷면에 창을 내었다. 지붕돌은 낙수면의 경사가 느리고, 처마는 느린 곡선을 그리다 네 귀퉁이에서 위로 치켜 올라갔다.

꼭대기에는 연꽃무늬가 새겨진 받침 위로 복발(엎어놓은 그릇모양 장식), 보주(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가 놓여 머리장식을 하고있다.

 

 

보물 제387호
지정일
1963.09.02
소재지
경기 양주시 회암동 산8 회암사
(불교중앙박물관 보관)
시대
고려시대

회암사터에 서 있었던 비석으로, 고려말의 승려인 나옹화상을 추모하기 위하여 세운 것이다.

나옹(1320∼1376)은 1344년에 회암사로 들어가 불교에 입문하였다.

1358년 원나라에서 돌아와 왕의 부름을 사양하고 구월산과 금강산 등에서 은거하다가 회암사로 다시 돌아와 절을 크게 새로 지어올렸다. 신륵사에서 57세로 입적할 때까지 불법만을 행하였으며, 입적한 후 시호를 ‘선각’이라 하고 그 이듬해에 비를 세웠다.

비의 모습은 당나라의 형식을 닮은 복고풍으로, 비의 머릿돌을 따로 얹지 않았다.

 즉 비의 몸돌 윗부분에 두 마리의 용을 새긴 후 그 중앙에 비명칭을 새기는 공간을 두었다.

비를 지고 있는 돌거북은 큰 돌을 단순한 조각기법으로 새겨 다소 추상적으로 다루어 놓았으나,

비머릿돌에 새겨진 용의 조각은 정갈하면서도 역동적이다.

비문의 글은 이색이 짓고, 글씨는 권중화가 쓴 것으로, 나옹화상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는 내용이 담겨져 있다.

비의 글씨는 예서체로서, 고구려 광개토대왕릉비와 중원고구려비 이후 고려말에 와서 처음이다.

이는 당시의 예서 연구가 어느 정도인지를 가늠하게 해주는 한 예이다.

1997년 보호각이 불에 타 비의 몸돌이 파손되어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보존처리를 실시한 후 보존관리상 2001년도에 경기도박물관에 위탁 보관하고 있다. 비가 있었던 원래의 자리에는 비 받침돌인 귀부가 그대로 있으며, 원형을 본따 만든 비가 세워져 있다.

 

 새로 증축중인 대웅전

 

 예전 대웅전을 옆으로 옴겨놓았습니다.

 

 신축 대웅전 전경

 

 

 삼성각

 

 

 

 

 

 

 

 

 

 

 

 

 

 

 

 

 회암사지 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