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조의 탄생 비화가 전해오는 수락산 내원암...
내원암은 경기도 남양주 별내면 수락산에 있는 사찰
주소 :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면 청학리 578
전화번호 : 031 - 841 - 8795
내원암 대한불교조계종 제25교구 본사인 봉선사의 말사이다.
강원도 건봉사乾鳳寺)의 스님이 묘향산(妙香山)에 있던 16나한(十六羅漢)을 옮겨 내원암에 봉안하여 ‘성사(聖寺)’라고도 불렸다.
《봉선사본말사지》에 신라시대에 창건된 것으로 나와 있지만, 사찰의 면모를 온전히 갖추기 시작한 것은 조선 후기부터로 1794년(정조 18)부터 왕실의 적극적인 후원과 승려들의 노력으로 사세가 점차 번창하였다. 1794년 조정의 지원으로 내원암 서쪽에 칠성각(七星閣)을 지었으며, 1796년 사성전(四聖殿)을 건립하였고 1825년에 지족루(知足樓)를 새로 지었다. 이어 1880년(고종 17)에는 조정에서 내원암의 모든 전각을 중건하였고 이후 1950년 한국전쟁으로 완전히 폐허가 되었으나 1955년부터 다시 옛 모습을 회복하기 시작하였다. 비구니 성민(性敏)스님이 칠성각과 요사·대방(大房)을 신축하였으며, 1968년에는 대웅전을 새로 건립하였다. 그 후 영산각(靈山閣)과 요사 2동이 지어졌고 미륵전을 복원하였다
물장수 스님과 순조의 탄생
남대문에 이상한 물장수가 나타났다. 허름한 민가 한 켠, 버려졌던 움막에 새 주인이 들어 오고 그 주인은 양민들의 가가호호를 방문하며 우물 물을 길어다 주는 일로 하루 세 끼니를 채웠는데 가족도 없고 만나는 사람도 특별히 없는 외톨박이였다.
무엇보다 그는 산중의 승려였음에도 저자 거리에서 물장수를 하고 있어 사람들의 관심거리가 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의 물장수 생활이 한 달 두 달을 넘어 한 해 두 해를 지나면서 그 특별한 사람에 대한 관심은 눈 녹듯이 사라져 버렸다.
사람은 무슨 일이든 잊기를 좋아 하기에 새로운 일에 관심을 보일 수 있는 것인지 모를 일.
새벽에 일어나 염불을 하고 참선을 한 후 물 지게를 지고 저자거리로 나서는 그 고단한 생활.
물장수는 남대문 저자 거리에 몸을 두고 있을지라도 마음은 늘 팔공산 파계사 법당과 저 구중 궁궐에 계시는 임금에게 가 있었다.
그의 법명은 용파(龍坡). 팔공산 파계사 호젓한 도량에서 수행에 몰두하고 있었으나 억불숭유의 정치적 기류와 그 기류를 타고 불교를 핍박하는 지방 사대부들의 탐심이 못내 가슴아프고 더러 화 나기도 하는 현실을 그냥 지켜 볼 수만은 없었다.
"내 한양으로 가리라. 임금을 만나 뵙고 이 중생계의 악업을 끓도록 진언 하리라."
그러나 그의 뜻은 쉬 이루어 질 수 없었다.
한양 땅에는 올라 왔으나 승려의 신분으로는 도성을 출입할 수도 없는 실정법이 가장 먼저 가로막고 섰던 것.
"할 수 없는 일이지. 국법이 그렇다면. 그른 법도 법이니 어기면서까지 내 주장을 할 수야 없는 노릇. 내 주장이 그르지 않은바에야 언젠가 기회가 오리라."
그래서 남대문 밖 움막 하나를 주선해 기거하며 물장수 생활을 시작 한 것이었다.
어지간 하면 다음 기회를 생각하거나 다른 방도를 연구하기 위해 다시 절로 돌아 갈만도 하건만 3년의 세월을 한결 같은 마음으로 물지게를 지고 다녔으니 스님의 성정도 여간 굳센 것이 아니라 해야 할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부처님의 감화를 입게 되었다.
지성이면 가피가 없을 수 없음을 반증이라도 하듯 물장수 용파 스님의 뜻이 이뤄질 인연이 무르익은 것이다.
"참으로 이상한 꿈이로다."
임금(정조)의 꿈이었다.
한줄기 상서로운 기운이 한양 하늘에서 내리 뻗더니 궁궐이 아닌 남대문 밖 어느 곳으로 장대하게 떨어지는 것이었다.
마구 달려서 그 서기가 떨어진 곳으로 가 보았는데 뜻 밖에도 허름한 움막집이 한 채 있었고 그 속에는 조용히 좌선삼매에 든 승려 한 사람이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그 승려에게 무슨 말을 하려다가 그만 잠이 깨 버린 것인데, 잠이 깬 후에도 그 꿈이 어찌나 생생한지 눈 앞에 다시 꿈의 내용들이 시현되는 지경이었다.
임금은 신하를 불러 남대문 밖으로 나아가 이런 이런 곳이 있는지 알아보라 일렀다.
"전하께서 말씀하신 대로 꼭 그러한 곳이 남대문 밖에 있었고 움막에는 몇 년전부터 승려 한 사람이 와서 물장사를 하며 살고 있다 하옵니다."
신하의 보고에 임금은 등골의 전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필시 그 승려가 할 말이 있음이다. 이리로 데려 오도록."
그렇게 용파 스님의 소원은 이뤄지게 되었다.
3년의 기다림 끝에 왕을 친견하게 되었고 지방 토호세력과 사대부들이 자아내는 억불의 실상을 낱낱이 고할 수 있게 되었다.
"단지, 저희 같은 승려가 잘 살자고 드리는 말씀은 아니옵고 불교를 핍박함은 이 나라의 정신을 억누르는 일이며 여러 산과 계곡의 절과 암자가 피폐하는 것은 민심의 피폐임에 조정과 국기(國基)를 튼튼히 하시기 위해서라도 일방적이고 터무니 없는 탄압은 삼가 하도록 하명이 계셔야 할줄로 아뢰옵니다."
임금은 "내 진작 그런 사정을 세세히 몰랐음이니 향후 일체 그런 일이 없도록 하리라"는 약속을 했다.
그렇게 임금을 알현하고 물러 나려는 순간 임금이 그윽한 목소리로 스님을 다시 불렀다.
"화상. 나는 하늘로부터 화상과의 만남을 언약 받은 일이 예삿일일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소. 화상이 간청한 일도 참으로 나라를 위해 갸륵한 일이 아닐 수 없고 내 그 청을 들어 주기로 약조도 했소. 그런데 나를 위해 화상의 특출한 법력을 발휘해 줄 수는 없겠소."
다름이 아니라 임금의 후사 문제였다.
중전이 다산을 하지 못하고 한 명의 왕자를 생산 했을 뿐인 정황에서 느끼는 그 은근한 조바심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었다.
"미력한 힘이나마 나라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용파 스님은 북한산 금선사(金仙寺)를 찾았다.
농산(聾山) 스님과 더불어 기도를 하기 위함이었다.
나라에서는 특별히 기도처를 물색하라는 전갈이 있었고 용파 스님은 북한산의 금선사와 수락산의 명당터를 골라 기도에 들어갔다.
수락산의 그 터는 이미 신라적부터 절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 곳이었다. 나라에서는 그 곳에 당우를 지어 주었다.
두 스님이 기도를 시작한 이후 임금은 불심을 발해 두 스님의 기도를 도왔다.
어느날 용파 스님이 북한산으로 찾아갔다.
농산 스님이 열심히 기도를 하고 있었다.
"대사의 기도가 날로 성성함인지 이 나라에 좋은 소식이 깃들 것 같소이다."
"화상의 기도 덕분이겠지요."
"대사. 이제 몸을 바꾸심이 어떨런지."
농산은 용파의 말이 무슨 뜻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날 밤 두 스님은 어느때 보다 정성스런 기도를 했다.
"제불보살이여. 이 나라에 감응하사 천년 국운을 융성케 하옵고...."
두 스님은 밤늦도록 기도를 했다.
산을 뒤 흔드는 목탁 소리에 두 스님의 염불소리가 파도처럼 일렁거리는 장엄한 기도였다.
이윽고 농산 스님은 눈짓으로 용파스님에게 자리를 피해 달라는 요청을 했고 용파는 농산을 향해 지극한 마음으로 3배를 올렸다.
그리고 용파는 총총히 금선사를 떠났다.
하늘에는 별들이 찬란히 빛나고 있었다.
용파 스님이 어두운 산길을 헤치고 하산 할 즈음 농산 스님은 조용히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그리고 산바람 한 모금을 들이 마쉬는 순간 그대로 적멸의 깊은 잠으로 빠져 들었다.
원적(圓寂). 스님의 죽음은 이 세상을 영영 떠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몸을 받아 다시 오기 위한 하나의 의례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원래의 적적한 자리로의 회귀였고 다시 인연을 따라 세상으로 나투는 성스러운 반전이었다.
북한산에서 기도를 하던 농산 스님이 입적 했다는 소식은 다음날 날이 밝기 무섭게 조정으로 알려졌다.
"용파 화상. 이 어찌된 일이오. 어제까지 기도에 정성을 쏟던 스님이 갑자기 입적하다니."
황급히 찾아 온 한 대신의 놀라움에 비해 용파 스님의 마음은 조용하고 여유롭기까지 했다.
"전하께 상고 하시오. 이제 우리 두 사람의 기도는 더 이상 필요치 않다고. 그리고 기도는 성취되어 조정에 경사가 있을 것임을..."
믿기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입궐한 대신은 용파 스님의 말을 임금에게 전했고 임금 역시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이내 그 궁금증은 풀어졌다.
수빈 박씨에게 태기가 섰던 것이다.
임금은 농산 스님이 왕자의 몸으로 다시 세상에 나오고자 짐짓 입적을 한 것임을 알 수 있었고 그 일을 도모한 두 스님의 정진력과 부처님의 감화에 거듭거듭 감읍할 뿐이었다.
"두 화상께서 나라에 이토록 경사스런 인연을 지었음이로다. 수락산 기도터에 절을 크게 짓도록하라."
임금의 명으로 용파 스님이 기도하던 곳은 신라이래 폐찰이 된 불운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고 농산스님이 몸을 바꿔 나툰 왕자는 훗날 보위에 올랐다.
임금의 둘째아들로 태어나 열살에 왕세자로 책봉되고 11살의 나이에 보위에 오른 임금, 조선의 제23대 왕 순조(純祖)였다.